세상 어떤 사람도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된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초등학생도
폐지를 끌고가는 할머니도
잘 차려입은 정장으로 프리젠테이션을 하고있는 증권맨도
모두 비슷한 무게의 인생 속에서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 온 사람들이다.
겉으로 보이는 결과가 서로 다른 것은.
개인이 거스르기 힘든 시대적 상황(ex 시대적 편견, 공간적 제약 등) 때문이지
그들이 근본적으로 못나거나 잘나서가 아니다.
이러한 보편적 인간 평등 법칙을 무시하고
그들 각각의 모습을 자기 멋대로 재단하여
천민자본주의의 은유를 들이댄다면,
결국 불행해지는 것은 본인 자신이다.
홍등가 여성이 논어와 중용을 논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의대 교수가 육두문자를 중얼거리며 지나가는 학생의 치마 속을 촬영 할 수도 있다.
반짝이 옷을 입은 여성이 동양철학을 논한다고 낯설어 할 이유는 없고
깔끔한 정장 남성이 가방에서 촛농과 채찍을 꺼낸다고 새삼스러워 할 이유도 없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모두 인간이기 때문이다.
.
.인.간.
자본주의라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이
어떤 형태이든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본질적인 인간으로서
너나 나나
그만큼 잘났고
그만큼 음흉하고
그만큼 못됐고
그만큼 착하다.
이 기초적인 평등 사상이
경제적, 권력적 모순에 잠식당하고 왜곡되면
나는 그녀에게 고정관념을 갖게되고
그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시선으로 다시 나를 바라볼 때,
비로소 나는
불행한 인간이 된다.
.
그러므로
구조적인 문제로 나에게 씌여진 불행,
그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남이 뭐라 지껄이든) 나 자신을 누구에게나 평등한 한 인간으로 인식하여야 하며
더 나아가
인간이란 존재 자체의 무한한 가능성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이 바로 '나' 이고
'나'라는 본체를 활용하여 세상을 살고 있는 존재도
다름아닌 '나' 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해야 한다.
위와 같은 인식의 흐름을 따르면
'내가 살고있는 세계' 를 지배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나 자신' 이 되고
'나만이 이 세계의 모든 황제적 권한을 가진 절대 주체' 가 되므로
흔들림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개혁을 실행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인식을 확장하여
다른 사람도 하나의 군주로서 대접할 때,
비로소 나는
행복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된다
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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