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시사의견

김대중 납치사건

Page T 2013. 1. 12. 16:50
728x90
반응형




사건 요약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의 야당지도자 김대중이 납치되어 한·일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된 사건. 

사건발생 당시 김대중은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 갔다가,

대기하고 있던 한국 정보기관 요원 5명에게 납치, 

수장(水葬) 직전 극적으로 구출되어 

사건발생 12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10시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



박정희의 김대중 혐오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기 전 부터 

자신을 견제하며 치고 올라오는 김대중을 몹시 싫어했다.


1967년 총선에서는 자신이 목포에 출마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목포에 출마하는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해

친히 목포 군중집회의 연사로 나서고 

국무회의를 목포에서 열고

목포를 위한다는 온갖 좋은 공약을 내걸었다.

추가로 부정선거까지


대한민국 전반으로는 공화당의 압승이었지만

그렇게 신경을 썼던 목포에서는 

김대중이 2000표 차이로 당선되어버린다.

박정희의 김대중 공략 실패


그래도 그나마 총선에서 공화당이 압승을 하였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다.


그러나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 밖의 고전 끝에 김대중에게 간신히 승리한다.


박정희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당시 600억 가량의 자금을 투입하여 투표를 조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과의 표 차이가 94만표 차이 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부정선거 관련 자료 참조]

1. 국사교과서 전반

2. 김종필 - "당시 돈으로 600억이 넘는 돈을 뿌렸다."

3. 연합뉴스 - 5, 6대 총선과 7대 대선에서는 ‘고무신’과 ‘막걸리’라는 단어가 ‘유권자’ ‘표’ ‘운동원’ 등과 함께 등장했다.

당시 집권당이 선거에 통반장을 동원했고 막걸리 한잔이나 고무신 한 켤레에 표를 사고팔았기 때문이다.

4. 동아일보 "경찰, 1980년대까지 선거에 불법 개입"

5. 노컷뉴스 - 한반도 부정 불법선거 열람

   


1971년 선거는 김대중이 다시 4년후 자신과 맞붙게 된다면 그땐 정말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겠다는 것을 

박정희 자신이 몸소 체험한 계기였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1971년 선거는 김대중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라는 말이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납치과정


박정희는 이 때부터 김대중을 극도로 경계하기 시작한다.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김대중이 일본으로 출국하는 1972년 10월까지 

1년 반 동안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김대중 동향보고가 무려 1100여건 이었다.

이는 대략 하루 두번꼴로 박정희가 얼마나 김대중을 밀착감시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김대중은 선거가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자동차 사고를 당하여 

영구적으로 옆구리 부상을 당하는 등의

의문점이 남는 사고를 연속적으로 맞이하게 된다.

김대중은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으로 도망간다.


김대중이 일본으로 도망간 직후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초헌법적 비상조치를 통한 유신헌법을 국민투표로 통과시켜 

유신독재 제 4 공화국을 탄생시킨다.



[* 당시의 국민투표]

 국민투표 실시에 앞서 특별조치를 선포하고 국민투표와 관련한 정당 및 사회인들의 찬반운동을 금함

 개표 참관인은 선거관리위원회가 선정하도록 함. 투표율 92.9% 찬성율 91.5%



이를 보고 국외에 체류 중 이던 김대중은

국내로의 복귀를 포기하고 일본에 남아

해외 반 유신활동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미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반체제 민주화운동을 벌이고

73년 7월 6일 재미교포들의 반 정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하여 명예회장이 된다.

일본에서도 한민통을 결성할 준비를 하고

결성 날짜를 73년 8월 13일로 정한다.

 

김대중의 이러한 활동은 박정희를 자극했다.

김대중의 행동에 부담을 느낀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일본에 비밀 요원을 급파하여 

김대중이 일본 한민통 조직을 설립하기 5일 전인

73년 8월 8일에 도쿄의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김대중을 납치하여 바다에 빠뜨리려하지만 

이를 알아차린 미국과 일본정부의 개입(특히 미국정부)으로

실패한다.


김대중이 서울로 돌려보내진 후

정부는 김대중을 5일동안 감금하고, 가택연금 시킨다.



결과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국내외의 비난여론은 일제히 박정희에게 집중되었다.

정부는 공권력 개입설을 부정했다.

일본 경시청에서 증거를 잡고 사건관련자 출두를 한국에 요구하자,

정부는 거부의사를 표시했다.

일본은 이 행위를 국권 침해로 판단하며,

한국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한일정기각료회의 연기, 대륙붕 석유탐사를 위한 한일교섭 취소, 경제협력 중단 등의

조치를 취한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박정희는 일본에게 보내는 친서와 함께

국무총리 김종필을 일본으로 보냈다.

김종필은 

"우리 대통령 (박정희)께서 당신이 난처하지 않게 배려하실 것이니 앞으로 '김대중 사건'은 완전히 잊어 주기 바란다." 

라고 말하며

뒷돈을 넣어주었다.(추정이지만 확실시)


이로써 한일 정부는 납치 사건을 적당히 마무리 했다.

아사히 신문 등에서 비방기사를 내었지만,

미국의 배후 영향력 행사와 

한일 정부간의 타협을 통해 

관계는 다시 정상화 되어갔다.


박정희는

미국, 일본 그리고 국내 여론을 의식하여

이 후로는 김대중에게 쉽사리 손대지 못한다.


대신

지역차별 등으로 

김대중을 간접적으로 공격한다.




의혹

 

두가지 의문점

1. 김대중의 납치가 박정희의 지시인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의 자발적 행동인가?

2. 원래 계획이 김대중 살해인가 납치인가?

 

범행의 윤곽

여러 증언과 문건을 통해 

박정희의 지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지휘 아래

총 46명이 9개조로 나뉘어 치밀하게 계획한 

살해 공작으로 결론.


[*근거]

1. 1998년 미국의 비밀문건 발표 

- "박정희는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해당사건을 승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2. 김형욱(전 중앙정보부장) - 1977년 6월 미국 하원 청문회 증언, 성명발표

"납치 사건은 박정희의 재가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며 가담 인물들의 명단을 소위원회에 제출함.

"박 대통령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개인인 김대중 씨의 문제를 이른바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해결하려 했다."며 성명발표.


3.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 최영근(전 국회의원)에게 고백

"대통령 박정희의 지시로 납치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을 없애라는 지시를 받고 너무 놀라서 차일피일 미루자 한 달 쯤 뒤에 다시 불러 호통을 쳤다

결국 나의 부하들이 모두 반대했음에도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4. 이철희(전 중앙정보부차장) - 증언

"이후락이 '김대중을 데려와야겠다. 데려오기만 하면 그 후의 책임은 내가 지겠다.' '나는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며

강력히 지시." 


5. 국정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박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최소한의 묵시적 승인은 있었다고 판단된다."

"박 대통령이 사건과 무관했다면 사건 발생 후 이후락 정보부장을 처벌하는 게 당연한데도 그렇지 않았고, 

사건 은폐를 지시한 점 등은 박 대통령이 사건의 공범 또는 주범임을 보여 준다."


반박자료 추가자료 환영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