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시사의견

냉전의 개념 3편 (마지막편, 냉전체제의 완화&붕괴)

Page T 2012. 1. 1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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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 완화 (데탕트)


*
데탕트(détente)는 '긴장완화, 휴식'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재임중에 소련, 동유럽과 관계개선을 추진할 때
활발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던 용어이다.

그 후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이 소련과의 정치대결을 피하고
대화의 틀을 구축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를 '미소 데탕트 정책'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후
데탕트 개념은
정책이나 상태의 긴장완화를 뜻하는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사진은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



흐루시초프의 평화 공존 표방으로 냉전이 다소 완화되었으나


*
흐루시초프(당시 소련 공산당 제1서기)는
스탈린이 죽은지 3년이 지난 1956년 스탈린을 비난하는 연설로
탈 스탈린 시대를 열었다.

그가 1958년 소련 공산당 총리로 등극하고 난 후에는
소련 내 이데올로기의 변화도 일어났다.

레닌과 스탈린이 생각했던
'제국주의와 소련과는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이념은
흐루시초프에 와서는
'숙명적으로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로 바뀐 것이다.

냉전체제는 흐루시초프의 평화 공존 표방 등으로
변곡점이 마련 되었지만
이것이 곧 냉전체제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쿠바위기(1962)나 베트남 전쟁(1960-1975)을 통한 간접적인
미국과 소련의 분쟁은
평화 공존 표방에도불구하고 
당시의 냉전상황이
심각하게 지속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진은 흐루시초프



쿠바 위기와 베트남 전쟁으로 냉전체제는 지속되었다.
*
http://godofstudy.tistory.com/entry/제2차-세계대전-이후의-세계-냉전체제의-성립
참고



서유럽과 일본의 경제 발전, 유럽공동체 결성, 중-소분쟁 등이 이어지면서
국제정치에서 이념보다 국가의 이익을 앞세우는 경향이 강해졌다.

*
즉 서유럽과 일본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부강해지고
유럽공동체가 결성되면서 유럽끼리의 결속력이 다져지고
중-소간의 분쟁이 일어나 중국과 소련이 충돌하게되고 하면서

2강(미국, 소련)체제였던 세계의 판도가
다(多)강체제로 변모하였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도 이념 논쟁으로 불필요한 힘을 낭비하기에는
치고 올라오는 일본, 유럽, 중국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래서 얘네들도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얼른
빨리빨리 발전하고 싶었음.




*
-서유럽의 발전과 유럽공동체-

서유럽은 2차대전을 겪고 냉전기간동안
미국의 지속적인 원조로 조금씩
경제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냉전이 끝날 무렵에는 유럽각국이 자체적으로
자유로운 공동체를 결성했다. 

그 완결판이 바로 유럽공동체(EC)이다.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는
유럽경제공동체(ECC) +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가 통합하여 1967년 7월 1일 설립된 기구이다.

평화와 경제 번영을 위한 유럽통합을 목적으로 세워졌고
1994년 1월 1일
EU(European Union, 유럽연합)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진은 유럽 공동체 (EC, 현 EU) 마크.



*
-일본의 경제발전-

일본경제는 2차세계대전의 패망으로
일본 정치, 경제, 사회는 모두 위축된다.

하지만 일본경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천운을 맞게된다.
(한국전쟁이 발생 소식을 들은 당시 일본총리가
'하늘이 일본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음)

한국전쟁으로 일본은 
미국의 군수산업 하청기지가 되고 
모든 군수물품을 일본에서 제작을 하게된다.

군수물품을 맡은 일본업체들은 
미국에게 기술이전을 받으면서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게되고

일본의 철강, 조선, 기계 기초산업, 중화학 공업 등
많은 분야의 산업이 발달하게 된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소니를 주축으로 한 가전제품,
도요타와 혼다를 주축으로한 자동차가
서구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이들은 일류기업으로 도약을 하고 

일본은 독일을 제치고 
제 2의 경제 대국으로 떠오른다.

사진은 소니, 도요타, 혼다.




*
-중-소분쟁-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를 중심으로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념이
제국주의에 대한 평화 공존으로 수정되었다

중국은 레닌주의의 정당성을 그대로 신봉하고자 하였고
소련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는 새 시대에 맞추어 수정되어야
한다는 수정주의를 추구했다.

이에 따른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에
공산주의 이념의 원칙에 대한 견해 차이로
많은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중소분쟁이라 한다.

이 논박으로 시작된 다양한 의견 충돌은
양국의 관계를 서서히 악화시켰다.

특히 중국과 소련은
1969년에 아무르 강(헤이룽 강)과 우수리 강 유역의 영유권을 두고
국경 분쟁을 벌였는데

이 분쟁시에는 양국간의 군사충돌까지 발생하였다.

이는 스탈린 사후에 중소의 대립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나타내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사진은 분쟁지역




이런 흐름에 맞추어 미국은 외교정책에 변화를 주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닉슨독트린(1969)의 발표였고
이어 닉슨은 중국을 방문하였다(1972).

닉슨 독트린
-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해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대처한다.
- 미국은 '태평양국가'로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 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과잉 개입은 하지 않는다.
-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원조는 경제 중심으로 바꾸며
다수국간 방식(미국 혼자가 아닌 여러 국가가 함께 경제 원조를 해주는 것)을
강화하여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




*
1950년대 후반부터 소련과 중국의 사이가 서서히 벌어져서 
서로간의 분사분쟁까지 일어나는 상황이 되었다.
닉슨은 이 틈을타서 중국을 방문(1972)하는데
이는 중국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도 있었다.

이 방문으로 미국은 대만을 버리고
중국을 국가로서 인정하기 시작한다.

이를 통하여
두나라간의 사이는 가까워졌고
미국과 중국은 무역을 시작하였고
스포츠교류, 경제투자도 함께 시작되었다.

사진은 악수하는 닉슨과 마오쩌둥(모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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