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시사의견

냉전의 개념 1편 (냉전체제의 성립)

Page T 2012. 1. 7.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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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진영 사이에서

 194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갈등, 긴장, 경쟁 상태가 지속된 대립 시기를 말한다.
 


'냉전(Cold War)'은 무기를 들고 싸운다는 의미의 전쟁 '열전 (Hot War)'과는 달리

전쟁과 같은 무력 사용을 중심에 두기보다는 경제나 외교 따위를 수단으로 삼아

간접적으로 대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BUT

한국전쟁, 베트남전쟁과 같은 대리전(Proxy War)을 통해 

서로에 대해 무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냉전시대의 라이벌 국가인 미국과 구소련



냉전 초기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으로는

'그리스 내전(Greek Civil War)'이 있다.

이 전쟁 또한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간의 대리전 양상을 띄고 있다.



그리스 내전은 1945년 에서1949년 사이에

영국, 미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정부군'과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민주군'과의 전쟁이다(2차례 발발).







그리스 정부군 vs 그리스 민주군



1차 전쟁(1945-1946)은 영국군이

그리스 정부에 대항하는 그리스 민주군을 진압하였다.



2차 전쟁(1946-1949)시에는

초기에는 영국군이 주도하는 그리스 정부군이

그리스 민주군에게 밀리는 듯 하였으나

트루먼 독트린으로 미국이 영국 대신 이 전쟁에 개입하여 지원을 강화하게 되고

결국 그리스 정부군의 승리로 전쟁은 끝난다.

그리스 정부군은 15만명의 병사를 투입했고

그리스 민주군은 5만명의 병사를 투입했다.

각각 5만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총 전사자는 약 10만명 가량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난민은 총 50만명으로 추산되는 등의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스 내전 당시 영국군 모습



이 그리스 내전을 계기로

미국은 반공정책을 강화하고 (트루먼 독트린, 1947)


*1947년 3월 미국 대통령 H.S.트루먼은 '그리스, 터키 원조 법안 승인'을 위해

'트루먼 독트린 (Truman Doctrine)'을 발표한다.

그것은 그리스, 터키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국내외로부터 위협받을 경우

미국은 자유국가를 지키기위해 양국에 군사원조를 실시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참고로 '독트린(doctrine)'은 원래 종교의 교리나 교의를 뜻하는 말이지만

정치의 무슨 주의, 학문의 무슨 신조를 나타내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소련은 이에 맞추어 베를린을 봉쇄해버린다(1948)


*
제2차 세계대전 후 4개국 관리하에 놓인
 
독일의 베를린 시(초록색 부분)는 소련 점령지 안에 위치했지만

소련이 혼자 가지기에는 상당히 중요한 지역(베를린은 독일의 수도)이었기 때문에

눈치상으로 서베를린을 서방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에게 떼어주게 된다.

즉 서베를린은 육지의 섬이 된 꼴로

서베를린을 제외한 사방은 소비에트연방의 지역이었다.

1948년 6월, 소련 점령 당국은 서방 연합국 측이 실시한

서독의 통화개혁(독일 마르크화 도입)을 동독통화에 대한 위협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소련은 미국, 영국, 프랑스를 베를린에서 쫒아내려는 속셈에서

베를린과 서방측 점령지구간의 모든 육로, 수로를 봉쇄하였고

'베를린에 대한 4개국의 통치는 종식되었고, 서방 연합국들은

더 이상 베를린에 대해 어떠한 권리도 보유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서방 연합국은 석탄과 식량 등 필요한 물자를 공중 수송함으로써

소련의 의도를 좌절시켰고, 베를린 봉쇄는 다음해 5월에 해제되었다.


*물자 공중수송!



소련의 베를린 봉쇄등의 강경 정책으로

서방국가들은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를 결성하여 집단 방위체제를 구축한다.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북대서양조약기구)는 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과 군사적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체결하였으며

유럽 내에서 반공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서유럽 국가들의 기본적인

군사적 집단방위조약으로 지속되었다.




따라서 공산국가 역시 바르샤바 조약기구(WTO)를 결성하게 되었다.


*WTO(Warsaw Treaty Organization, 바르샤바조약기구)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심각한 동서대립 속에서 NATO에 대항하기 위해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8개국의 총리가 1955년 5월 11-14일 폴란드 바르샤바에

 모여 체결한 군사동맹조약기구이다.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8개국이 조약의 체결국이었다.

알바니아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소련의 군사개입에 항의하며 탈퇴(1968)

독일의 통일로 동독의 탈퇴(1990)

소련의 해채(1991) 등으로 조약이 유명무실해졌고

1991년 7월 1일 프라하에서 열린 모임에서 공식 해체를 선언했다.


*NATO와 WTO의 대립



양대세력의 또 다른 대표적인 충돌로

6.25전쟁, 쿠바 위기, 베트남 전쟁이 있다.


*쿠바(미사일)위기는 1962년 10월 22일-11월 2일 11일 동안

소련의 중거리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는 시도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이 대치하여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국제적 위기를 말한다.

사진은 소련에서 들여온 미사일을

쿠바에서 미국으로 발사할 경우

어디까지 공격이 가능한지

타격 사정거리를 표시한 지도이다.




1953년 7월 26일 - 1959년 1월 1일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등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두 차례에 걸친 무장 투쟁을 벌려

1959년 1월 1일 완수한 혁명이 있는데

이것을 '쿠바혁명'이라고 부른다.



이 혁명을 통해서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친미 독재정권이 전복되고

쿠바는 '피델 카스트로'를 주축으로한 

공산주의 국가의 새 정부가 설립된다.

사진은 체 게바라




자신의 나라 코 앞에 공산주의 국가가 생겨버린

미국은 이것이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존F. 케네디'의 미국 정부는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1961년 4월 1500여명을 동원해 쿠바 남부지역을 공격한다 (피그스 만 침공)



하지만 소련의 훈련을 받고 무장한 쿠바군에게 격퇴되며

3일만에 1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1000여명이 포로로 잡히고 만다.



이로 인해 미국과 쿠바와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사진은 피그스 만의 위치를 보여준다.




이러한 냉각 분위기 속에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사회주의 진영의 전력 공고화를 위해서

소련의 미사일 전진배치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를 파악한 미국은 쿠바에 소련 미사일을 전진배치하는 

작업을 중지하라는 압박을 넣는다 



세계 3차대전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미국의 강력한 외교적 저항에

소련의 '니키타 후르시쵸브'는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미사일 철수에 동의한다.



사진은 오른쪽부터 각국의 지도자인

존F. 케네디(미국), 피델 카스트로(쿠바), 니키타 후르시쵸브(소련)




 


*베트남 전 (Vietnam War, 1946-1954, 1954-1976, 미군개입:1961-1972)은

초기 북베트남과 프랑스의 독립전쟁과 후기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통일전쟁으로 분류할 수 있다.


베트남은 1945년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독립하게 된다.

(1941-1945까지 일본이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었다.)



일본이 패전한 이후 영국과 중국(장개석)의 군대가

일본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에 진주한다.

17도 선을 중심으로 해서 남쪽에는 영국군

북쪽에는 장개석 군대가 진주하게 된다.



사진은 당시

북 베트남과 남 베트남의 지도




하지만 장개석 군대는 중국 대륙에서 모택동 정부와 싸우는 과정에서

패퇴하면서 궁지에 몰려 스스로 철수하게 되고

북쪽은 호치민이 지도하는 인민 해방군이 독립정부를 세우게 된다.



또한, 영국측 남베트남에서는

'바오다이'를 앞세운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그 후

베트남을 식민통치했던 전력을 갖고있는 프랑스군이

영국군에 강한 압력을 넣어 영국군은 철수하고

영국군 대신 프랑스군이 남베트남에 주둔하게된다.

사진은 왼쪽 호치민, 오른쪽 바오다이




프랑스 군은 공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1949년부터 17도 선을 넘어서 북베트남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남베트남 군인들의 프랑스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한 군 내 사기저하와

북베트남군(월맹군)의 격렬한 게릴라공격으로

프랑스군은 차차 밀리기 시작하고



프랑스군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디엔비엔푸를 월맹군이 점령하면서

프랑스는 패전하였다.

사진은 디엔비엔푸 패전 당시 사로잡힌 프랑스인 포로행렬.




프랑스가 베트남에게 항복을 선언하면서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을 맺었다

 휴전협정을 맺으면서 프랑스군은 모든 군대를 철수했고

남과 북은 전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했지만

총선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혼란과 내전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미국이 직접 개입하여

제네바 협정을 무시하고

남측에서만 따로 정권(고 딘 다엔 정권)을 수립하게 한다.



이에 반발한 남베트남 국민들의 '민족해방전선' '베트콩' 등

반정부 반미 투쟁이 일어나자

이에 미국은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명목으로

1961년 공식적으로 정규군을 베트남에 투입하게 된다.

사진은 포로로 잡힌 베트콩




1964년 8월에는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구축함에

선제공격을 가하였고 전투가 일어났다는 것을 빌미로 하여
(통킹만 사건; 후에 이 사건은 베트남전 명분을 세우기 위한 미국의 자작극으로 밝혀졌다)

미국은 베트남전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이에따라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이에 맞서 중국과 북한도 비공식적으로 각각 전투원을 파견하여

북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베트남전은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된다.

사진은 통킹만 사건에 대한 개요




남베트남 군인의 비협조와

닉슨 대통령의

아시아에 대한 개입을 줄이는 것을 골자로한

닉슨 독트린 발표 등으로

베트남전은 지지부진하게 늘어지는 가운데

결정적으로

공화당인 닉슨 대통령 정권이 재선을 위해 

워터게이트라는 빌딩 안에 있는 민주당사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일명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서

미국은 베트남전에 서서히 손을 놓게 되었고

1973년 초 완전히 베트남과 관련하여 손을 떼게 되었다.

사진은 미국의 닉슨 대통령




그리고

1975년 초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대한 총 공세를 벌였고

4월 30일 사이공(후에 호치민 시로 명칭 변경)이 함락되면서

남베트남의 '동방민' 대통령이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1976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통일에 합의하여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세워졌다.

사진은 북베트남 군의 진격로




이 전쟁으로 인해

남베트남 측은 (베트남 공화국, 미국, 대한민국, 타이,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 등 포함)

28만명의 사망자와 149만명의 부상자를 낳았고

북베트남측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 및 베트콩, 중국, 소련 등 포함)

117만명의 사망자와

60만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우리나라는 4,407명의 사망자와

11,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사진은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국산 공포영화 '알 포인트'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주변국인 라오스와 캄보디아 역시

베트남과 비슷한 경로(내전 -> 공산주의 정부 승리)로 공산화 되었다

이를두고 도미노 이론이라고도 한다.

사진은 베트남과 그 주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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